지구에 온 사나이 #1
본격 SF 정치풍자 개그 소설, 10년만의 부활! (정말?)

지구에 온 사나이 #1

1200…72…08년 26월 37일 27시
- 탐사대원 우르의 일기 중에서

내가 '우주 방방곡곡 탐사대' 대원으로 선발된 날, 나를 아는 사람들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번 우주 탐사대의 앞날이 걱정되는군."
하지만 내가 갈 곳이 지구란 사실을 알려주면,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하기 일쑤였다.
"너 정말 우라지게 재수 없는 놈이구나."
그렇다. 정말 맞는 말이다. 거룩한 카수무와 125사도의 이름으로 전우주의 문명화되지 않은 별들을 돌아보는 우주 탐사대 대원으로 선발된 것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는 증거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위대한 시인 아리수노가 '엇그제 후벼판 코딱지보다 보잘것없는 깡촌 중의 깡촌이자 붉은달의 야생원숭이보다 지성이 떨어지는 것들이 고등생명체랍시고 거들먹거리고 다니는 벽촌 중의 벽촌'이라고 표현한 지구를 탐사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것은, 우라지게 재수가 없는 동시에 9촌 이내에 연줄이라 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이었다.
하지만 재수가 없다고 해서 머리까지 없으란 법은 없다. 우리들 열 명의 지구 탐사대원은 있는대로 잔머리를 굴려서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아냈다. 즉, 있는대로 삐대기로 결심했다.
우주시간 6개월이면 충분한 항해는 12개월로 늘어났다. 그 사이에 술과 안주거리의 재고가 위험 수준까지 내려갔다. 지구 근처에 도착한 뒤로는, 2개월 내내 지구인들이 쏘아올린 인공위성 갯수를 헤아리며 빈둥댔다.
결국 오늘 아침, 본국에서 총 1만 8천 문자를 넘는 장황한 전문(電文)이 날아왔다.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이 게을러터진 굼벵이 자식들 같으니라구. 당장 지구로 내려가서 탐사 활동을 펼치지 않으면 근무태만죄로 감옥에 처넣겠다!"
그걸 읽은 탐사대장은 턱수염을 긁적이며 어깨를 움츠렸다.
"어차피 창고의 술도 바닥날 지경인데, 슬슬 일이나 해볼까?"
모두들 한결같이 입을 모아서 대답했다.
"좋죠. 삐대는 것도 질리던 참이니까요."
우리는 각자 맡은 구역을 탐사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래봐야 별 거 없었다. 위조된 지구 화폐, 위조된 신분증, 지구인의 옷을 베껴 만든 누더기에 칫솔과 치약, 마지막으로 내 사촌동생이 영업사원으로 있는 카두만 출판사의 [지구 탐사 지침서]가 있었다.
[지구 탐사 지침서]는 우주시간 50년 전의 탐사 내용을 기초로 45년 전에 출판되어 지금까지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카두만 출판사는 지구 탐사대의 공식 스폰서 중 하나였고, 우리는 탐사 도중에 이 책의 내용을 개정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사촌동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고작 50년 사이에 깡촌이 변해봐야 얼마나 변했겠어요? 그냥 적당히 빈틈에 낙서나 해서 가져 오세요."
나는 서울이란 동네로 내려갈 예정이었다. 머리색과 피부색이 그쪽 동네 원주민들과 똑같다나 뭐라나. 하기사 어딜 가든 무슨 상관이람. 대강 삐대다가 돌아올텐데.
오늘은 여기까지 써야겠다. 내일은 좀 바쁠 테니 일찍 자는 편이 좋겠지.

08년 6월 4일
- 한모씨의 일기 중에서

정말 우라지게 재수없는 날이다.
아침부터 캠퍼스 크레이지 군단(CCC)이라는 정신나간 놈들과 부딪혔기 때문이다.
"혹시 예수님을 아시나요?"
그 더러운 놈들이 내 성스러운 면전에 내뱉은 너절한 말에 대한 답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그 자식 사생아잖아?"
캠퍼스 크레이지 군단(CCC)은 쓸쓸히 패퇴(敗退)해 갔다. 그들은 비참한 패배자였고 나는 거들먹거리는 승리자였건만, 승리의 미소는 까닭모를 불안감과 함께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갔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그 천하에 빌어먹을 놈들을 만난 날은 일진이 사나웠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1교시 강의부터 레포트가 산더미처럼 나왔다. 빌어먹을 최교수. 그놈은 학생들을 레포트의 산더미에 깔아뭉개 죽이는 것이 평생 소원인 모양이다.
3교시 시험에선 조교가 강의실 안을 돌면서 계산기를 리셋해 버렸다. 다섯 시간에 걸쳐 공식을 입력해 놨는데 그걸 리셋해 버리면 난 어쩌라구? 결국 백지에 가까운 시험지를 내고 말았다.
점심시간, 학생 식당에선 중국산 깍두기에 멀건 콩국을 반찬이랍시고 내놓는 만행을 저질렀다. 나를 비롯한 복학생 일동은 각목을 들고 80년대의 광주 민주화 운동을 학생 식당에서 재현하고픈 충동과, 본능적인 식욕 사이에서 한참 동안 갈등해야만 했다. 결국 나는 배고픔에 굴복했다.
6교시의 교양 경제학 강의 역시 참으로 고단하기 짝이 없었다. 보통 때는 학생들이 자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않던 김교수가 갑자기 독수리의 눈을 번득이며 학생들의 수면을 방해한 것이다. 덕분에 한숨도 못잤다. 제길헐.
저녁을 대충 먹고선 곧장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 땅에 경제 위기를 불러들인 자가? 이 땅에 취직난이란 말과 유가 파동이란 말과 광우병이란 말과 기타 오만가지 짜증나는 말을 창조하는 자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누군지 잡기만 해 봐라, 군화발로 자근자근 밟고 죽을 때까지 이쑤시개로 찔러대고야 말리라.
정말 기분나쁜 하루였다. 하지만 그 기분나쁜 하루의 마지막에 일어난 일은 더더욱 어처구니 없었다.
밤 11시 30분에야 도서관에서 나와 담배 한대를 물고 탁한 공기로 더럽혀진 밤하늘에 침을 뱉으며 공대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데 발에 뭔가 걸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계단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질 뻔 했다. 뭔가 하고 봤더니, 왠 이상한 녀석이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정말 황당한 놈이었다. 한여름이나 다름없는 이 계절에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코트를 입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길렀는데, 시체처럼 바짝 마른 창백한 얼굴엔 땀 한 방울 맺혀 있지 않았다. 엄마젖을 덜 먹은 계집애처럼 생겨먹은 상판을 보아하니 신입생이 틀림없는데, 멍한 눈으로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뿐이지 사과의 말이라곤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뻗쳐서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미안하다고 말하면 어디 덧나냐? 이 자식. 꼴 보니 신입생 나부랭이 같구만, 도대체 요즘 신입생들은 선배에 대한 예의를 어디다 팔아먹고 오는 거야? 엿장수한테 팔았냐, 아니면 카트 라이더 아이템 살려고 팔아먹었냐? 그러면 안돼지! 여기 공대 계단은 모든 공대생들의 물건이야. 네가 의자처럼 떡하니 앉아있는 곳이 아니라고! 너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 그렇게 살다가 비오는 날 먼지 풀풀 날리게 얻어맞는다."
내가 숨을 쉬려고 잠시 말을 멈추자, 녀석은 갑자기 고개를 푹 수그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마시던 숨을 켁켁대며 내뱉었다. 이런 황당한 녀석이 있나. 방금 전까지 뻗댄 건 대체 뭐냔 말이다! 그냥 솔직하게 '왜 처음 보는 사람한테 반말이야?'라고 대들었다면 나의 기가톤 폭탄급 주먹으로 개떡을 맹글어 버렸을 텐데,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김이 새서 맥이 축 빠졌다.
시비는 그만두고 그냥 자취방에 돌아가야겠다 마음먹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녀석이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며 중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사람들은 계단을 내려가다 멀쩡한 사람을 발로 차고서는 다짜고짜 화를 내는 습성이 있다. 좋아. 기록 끝. 별건 아닌것 같지만, 나름대로 쓸모있는 정보일지도 몰라."
저런 정신나간 녀석도 신입생으로 받아 들이다니, 우리 학교 이사진들이 제정신이 아니던가 재정상태가 개판이던가, 둘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방에 가만히 앉아 키보드를 두들기다 보니 화가 불끈불끈 치솟는다. 내일 학교에서 그녀석을 만나면 그냥 놔두지 않겠다. 박살난다는 말이 무슨 뜻이 철저하게 가르쳐 주고야 말리라. 내 오른쪽 주먹에 맹세코!

지구력 08년 6월 4일
- 탐사대원 우르의 일기 중에서

어제 밤, 나는 목적지인 서울에 내려왔다. 상상 이상으로 형편없는 달동네였다. 이런 더럽고 지저분하고 원시적 곳에선 후루바스 별의 붉은 바퀴벌레도 하루만에 자살해 버릴 것이 틀림없다. 한숨만 나왔다.
은신처로 가는 도중에, 서울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명문 대학에 잠시 들러 봤다. 역시 깡촌의 대학은 달랐다. 후루바스 별의 붉은 바퀴벌레의 열두번째 다리에 낀 때만큼이나 볼품없고, 먼지처럼 비좁고, 골동품처럼 낡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이런 곳이 명문 대학이란 간판을 내걸고 있으니 지구란 동네가 영원한 깡촌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나는 한시라도 더 삐댈 작정으로 계단에 기대 앉았는데 누군가가 내 등을 냅다 걷어찼다. 아픈 등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드니, 지구 나이로 2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지구인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마구잡이로 성질을 부리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깡촌의 원시인들보다 2백 5십만배 이상 훌륭한 지성을 갖춘 선진국 국민답게 침착한 처신으로 일관했다.
즉, 될 수 있는대로 정중한 말을 한 다음에 몸을 슬쩍 피했다. 비록 내게는 저 원시인들을 1억분의 1초 사이에 원자 이하의 단위로 분해시킬 힘과 능력이 있었지만, 불쌍한 원시인들을 함부로 죽이는 것은 내 취미가 아니었다. 불행히도 탐사대원 중의 일부는 그 힘을 남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오늘 아침, 나는 위조 신분증을 가지고 다시 대학에 찾아갔다. 대학생이란 신분은 활동하기에 무척 편리하다는 이야기를 지침서에서 읽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 모이는 지구인들은 개중에 제일 똑똑한 족속이니만큼 지성이란 것을 한 조각이나마 가지고 있을 터이니, 아주 약간은 이야기가 통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내가 대학 정문에 발을 들여놓기 무섭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인간들이 달라붙은 것이다.
"혹시 예수님을 아시나요?"
예수? 그게 뭐지? 나는 잠시 생각한 뒤에, 손가락을 튕기며 이렇게 말했다.
"혹시 인류 문화의 중요한 현상의 하나로 미의 표현을 목적으로 하는 기술 또는 작품으로 건축, 조각, 회화, 음악, 시가, 소설 등을 일컫는 그거 말씀입니까?"
그 사람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내가 너무 유식한 척 했나?
"그건 예술인데요. 저희가 말하는건 예수님이거든요."
아, 이런. 내가 착각한 모양이다. 나는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그렇다면 예법에 따라 거행하는 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건 예식인데요?"
이거 참. 예수가 뭐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난다. [지구 탐사 지침서]에는 뭔가 나와 있으려나?
그 때, 어젯밤 계단에서 만난 지구인이 떡하니 내 앞을 가로막고 서더니만 큰소리로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그 자식, 사생아잖아?"
그 말 한마디에, 날 붙들고 있던 사람들은 종적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제 계단에서 만난 사람은 내 어깨를 떡하니 붙들면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자네 정말 마음에 드는군!"
그래서 우린 친구가 되었다. 그 친구 이름은 한동진이라고 한다. 정말 다행스런 일이다. 탐사 활동이 한결 쉬워질 것 같다.

08년 6월 5일
- 한모씨의 일기 중에서

어제 계단에서 만난 녀석은 절대 정신나간 녀석이 아니었다.
사나이의 무협지를 붕어빵 찍듯이 양산한 작가, 야설록의 방식대로 표현하자면 - 그는 진정한 사나이였다! CCC의 파상적인 공세에도 고개 한번 꺾지 않고 그들을 놀려먹는 용기를 가진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다!
그의 이름은 유영철이라고 했다. 유영철이라,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아무려면 어떤가. 사나이에겐 이름이 중요하지 않다. 오직 행동만이 중요하다!
어쨌건 나는 그에게 CCC와 예수의 위험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 강조했다.
"죄 미친 놈들이야. 절대 가까이 가선 안될 놈들이지."
"왜죠?"
"모기와 거머리 못지 않게 유해하거든."
"모기와 거머리……?"
"그래, 사람 피를 빨아먹고 사는 것들이란 말이야."
"저런! 정말 지저분한 것들이군요."
"내가 여태껏 말하고 싶었던 게 바로 그거라네!"
학생증을 보아하니 유영철은 이제 겨우 1학년이었다. 귀여운 것!
나는 그를 후배라 부르기로 했고 그는 나를 선배라 부르기로 했다.
"그런데 선후배라고 하면 친구 사이와 비슷한 건가요?"
그의 물음에 난 이렇게 답했다.
"겉보기엔 비슷하지만 실은 크게 다르지."
"뭐가 다르죠?"
"선배가 되면 술값을 더 많이 부담해야 한다네."
"그렇다면 후배가 더 좋겠군요."
"하지만 선배가 좋은 점도 있지."
"그게 뭐죠?"
"후배가 개기면 두들겨 팰 수 있다는 거지. 물론, 후배가 선배의 주먹을 피해 도망칠 권리 같은 건 없고."
그는 지방에서 올라왔다고 한다. 청학동에서 올라왔는지,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하지만 귀여운 후배여, 걱정하지 마라. 사나이 중의 사나이인 이 한동진이 직접 너에게 이 지저분한 세상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려주도록 하겠다.
그리고 예수쟁이 타도의 서사적 운명 역시 너에게 물려주도록 하겠다!

by DJHAN | 2008/06/08 02:03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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